Topic : 이달의 화제

문학의 공간

에디터 : 김재희 김선주 박중현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특정 공간이나 장소는 이야기의 배경이자 그 자체만으로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공간이나 장소를 이해함으로써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보다 효과적으로 높일 수도 있다. 이들 장소는 작품 속 묘사를 통해 활자에서 이미지로 되살아난다. 숲과 언덕, 도시와 섬, 바다와 우주 등 다채로운 풍광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독자로 하여금 장소를 상상하게 하고, 찾아가 보고 싶게 만든다. 이러한 장소에 대한 애착을 통해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은 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달의 토픽에서는 장소가 문학과 관계 맺는 양식을 살펴봄으로써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감상해보려 한다. 문학 속 배경으로 등장한 매력적인 장소들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작가의 삶과 공간이 소설 속에서 어떻게 투영되고 변주되었으며, 때로 이들 공간이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어떻게 새롭게 규정하는지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작품 속 그곳으로
순수와 환상의 세계, 에치고유자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일본 근대문학 전 작품을 통틀어 보기 드문 명문장으로 손꼽히는 『설국』의 첫문장이다. 소설 속 애달프고도 유려한 문체와 닮은 눈 덮인 산은 실제로 작가가 작품을 집필하며 머물렀던 곳으로, 도쿄와 불과 한 시간 반 남짓한 거리에 있는 니카타 현의 에치고유자와이다. 겨울이면 온통 하얗게 쌓이는 눈과 온천을 즐기러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많다. 현재 에치고유자와에 가면,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는 다카한 료칸을 만날 수 있다. 료칸 내부의 전통적인 인테리어와 소품과 더불어 그의 자료를 진열해 놓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료관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준다. 료칸에서 온천을 즐긴 후, 작가가 머물었던 방에 있노라면 창밖으로 펼쳐지는 산의 풍경에 절로 눈이 갈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창작의 집이 되었던 공간에서 그를 추억하는 특별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료칸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왕복 이차선 큰 도로를 지나면, 『설국』을 전시해 놓은 설국관이 나온다. 전통가옥을 재현해놓은 방과 사진, 도구, 눈 내리는 지역의 생활상 등을 구경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설국』의 캐릭터인 코마코의 실제 모델인 마쓰에가 살던 집이 현재, 설국관이 있는 자리라는 점이다. 야스나리는 1934년에 처음으로 에치고유자와를 방문해 당시 19살이던 게이샤 마쓰에를 만났는데, 소설 속 코마코처럼 사랑을 나눈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실제 그녀의 사진과 소설 속 코마코의 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설국』의 탄생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스와 신사이다.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가 에치고유자와를 처음 방문했을 때 코마코와 이곳을 찾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야스나리는 실제로 소설 구상을 위해 이곳을 여러 번 들렀다고 한다. 800년이 넘은 오래된 신사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흐른다. 큰 삼나무가 둘러싼 신사를 걷다 보면, 시마무라와 코마코가 사랑의 맹세를 나눴던 너럭바위가 보인다. 신사를 찾은 많은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시마무라와 코마코의 애절한 사랑을 떠올리곤 한다.

문학의 토양이 된 작가의 장소
제인 오스틴 소설 속 사교계의 무대, 영국 바스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삶과 작품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몇 곳 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아름다운 해안선이 있는 영국 남부의 햄프셔는 그녀가 태어난 곳이자 여생을 보낸 지역이다. 오스틴은 이곳에서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을 비롯한 작품들을 다듬어 세상에 내보였다. 그러나 이는 말년의 일로, 중간에 그녀는 교구 목사였던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1801년부터 그가 죽은 1805년까지 가족과 함께 바스로 이사해 5년간 거주하게 된다. 바스는 고대 로마인들이 건설한 온천 도시로, 욕실을 뜻하는 ‘Bath’도 여기에서 나온 단어다. 온천이 유명한 만큼 18세기 영국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휴양 도시였는데, 이는 아담하고 조용한 고향과는 달랐다. 원래 살던 햄프셔주 스티븐턴에 애착이 컸던 오스틴은 바스로 이사하고 한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화려한 사교계 문화를 즐기지 못했고, 바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마지막 작품 『설득』에서는 바스가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함에도 주인공인 앤은 바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바스는 그녀의 소설 곳곳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한 번도 집을 떠나본 적 없는 17살 캐서린이 처음으로 멀리 여행을 떠나 바스와 노생거 사원에 머물면서 겪게 되는 사랑과 모험을 그린 작품 『노생거 사원』 또한 바스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소설, 공간으로 다시 읽기
『그리스인 조르바』와 크레타
– 떠나서야 비로소 다시 보이는 자유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 무대인 그리스 크레타섬은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에게는 조국이자 고향이지만, 소설 속 인물 ‘나’에게는 여행지다. ‘나’는 그리스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젊고 유복한 지식인으로 살다 지식의 효용에 대한 고민을 풀고 세상을 직접 경험하고자 즉흥적으로 크레타행 배에 오른다. 배에서 무조건 자기를 데려가 달라는 조르바와 우연히 만나고, 그의 얽매이지 않는 사고와 솔직한 언행에 흥미를 느껴 동행을 이룬다. 갈탄 광산을 개발해 모두 함께 잘사는 공동체를 조직해보겠다는 이상적인 꿈을 꾸지만, 말 그대로 이상이었고 개발은 망한다. (나중에 “우린 석탄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니”라는 ‘나’의 말에 조르바는 덩실덩실 춤을 춘다!) 겪는 것은 역시나 계획에 없던 인명 구조, 과부와의 놀아남, 부패한 수도원 기행, 비인간적인 마을에서 휘말린 싸움 등이다.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매사 관찰하며 이성과 지성으로 해결하려는 ‘나’와 직접 뛰어들어 본능과 열정으로 위험을 이겨내는 조르바의 교감은 크레타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생길 수 없는 것이었고, ‘나’의 일생에 가장 농도 짙은 경험이었다. 사실 지금이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섬이지만, 그때 당시 크레타는 아름다움보다 잔혹과 고뇌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자키스는 1883년 터키의 지배 아래 있던 크레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유와 이념의 전쟁터를 보고 자랐으며, 작품을 집필한 1946년은 잠깐의 독립을 쟁취했던 크레타가 이미 그리스에 합병된 지 3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소설 속 크레타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겉보기에 평화롭고 자유롭지만 조국과 공동체와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죽기도 전에 물건을 약탈하고 수도사들은 파괴를 일삼는다. 세상과 자신의 공부에 대해 주체적 시각을 세우게 한 것은 나고 자란 고향이 아니라 떠난 타지였으며, 가까운 학우나 선생이 아니라 신실한 타인이었으며, 장엄한 삶의 단면이 아니라 미개하고 처절한 평면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다시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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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hugo kemme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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